The Column : Behind Special Report

“믿게 만드는 힘”

289호 (2020년 1월 Issue 2)

“나는 훌륭한 배우들을 데려왔을 뿐, 그들이 나를 멋져 보이게 한다. 그게 진실이다. 페넬로페 크루즈, 엘렌 페이지, 알렉 볼드윈을 캐스팅해 보라, 연기를 잘할 테니까. 그들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연기를 잘했고, 나를 떠난 후에도 잘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잘 써먹을 뿐이다. 내가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그건 사실 속임수에 불과하다.”

기발한 상상력, 인간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많은 팬을 거느린 미국의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로마 위드 러브(to Rome with Love)’에 대해 설명하면서 감독의 역할은 ‘뛰어난 사람들을 기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이 그의 진심일지, 아니면 앨런식 유머에 흔히 녹아 있는 자기 비하와 겸양의 표현일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말처럼 모든 영화, 음악, 패션, 미술 등의 창작물은 이미 있는 재료를 버무리거나 다른 창작자들의 재능을 훔친 얕은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를 통해 만난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못 박고 있듯이 말이다. 약간만 뒤틀고, 쪼개고, 섞으면 익숙한 것도 새로운 것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만한 창작물을 봐도 감동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익숙하면 금세 싫증을 내며, 창작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진위나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 때문에 이제는 감독보다 배우, 프로듀서보다 출연자, 작가보다 캐릭터 등 작품 속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의 매력과 소통 역량이 훨씬 중요해졌다. 공급자가 얼마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느냐보다 소비자가 얼마나 마음을 열고 새롭게 느끼느냐에 크리에이티브 산업의 성패가 달렸기 때문이다. 브랜드 메시지를 만드는 김정아 이노션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의 말처럼 오늘날의 크리에이티브란 곧 ‘믿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최근 EBS의 전성기를 이끄는 펭수도 이 같은 ‘메신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펭수는 지금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 소속사를 옮길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없다”고 답한다. 월드스타가 되려면 EBS의 김명중 사장보다 BTS를 키워 낸 방시혁 대표가 더 낫지 않겠냐는 우문(愚問)에도 “사장님도 능력이 있지만 그걸 이뤄내는 건 BTS와 펭수”라는 현답(賢答)으로 맞받아친다. “내 라이벌은 나 자신”이라는 펭수의 패기는 신입 연습생의 치기 어린 허풍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크리에이터 본인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제는 프로듀서의 화려한 연출, 작가가 완벽하게 짜준 대본, 대형 소속사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만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다. 반대로 펭수의 애드리브, BTS의 자작곡처럼 크리에이터의 솔직하고 진심 어린 이야기는 나이, 성별, 국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다. 이 같은 변화는 개별 크리에이터들이 마음껏 활개 치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삐를 풀어줘야만 소위 ‘사장님’들도 이들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는 고삐 풀린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변형되고 확장되면서 새로운 소비자 경험을 창조하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했다. 크리에이티비티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08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2020년 11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