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배움의 기쁨 설파한 『논어』 첫 구절의 운명

264호 (2019년 1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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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at a Glance
『논어』 첫 구절의 궁극적인 신비는, 배운다는 일의 호소력을 다름 아닌 그것이 유발하는 기쁨에서 찾았다는 데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돈이 되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존경받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미남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대신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움이 가져다주는 효용 때문에 지겨운 공부를 참아가며 해온 많은 이에게 이 언명은 놀랍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한때 배움의 기쁨을 안내하던 『논어』의 첫 구절은 과거시험 합격을 위해 외워야 하는 대상이 됐으며, 모범답안과 함께 돌아다니는 신세가 됐고, 결국에 가서 배움의 희열을 잃는 과정에 일조하게 됐다. 세속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배움의 기쁨을 설파하던 텍스트가 세속적 성공의 필수과목이 된 것이다.


편집자주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추석 연휴를 뜨겁게 달구는 등 그동안 리듬감과 유머, 해학이 어우러진 글을 선보여온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논어』 해설에 나섭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최고의 고전 『논어』에 대한 김영민 교수의 창조적 해석은 경영자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줍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 해설 1: 학(學)이란 무엇인가
『논어』를 여는 단어, ‘학’(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子曰)라는 표지를 뺀다면 현행 『논어』의 첫 글자는 학(學, 배우다)이다. 『논어』와 같은 고전에서 제일 앞에 오는 단어라니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실로, 『논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 중 한 사람인 윤재근은 “공자(孔子)는 왜 『논어』 맨 앞에 학이(學而)란 말을 던져놓았을까? 이 학(學) 뒤에 목적어로 유자(有子)의 효제(孝悌)를 두어도 되고,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을 두어도 된다는 뜻은 아닌지 살아가면서 곱씹어보게 된다” 1 라고 자문자답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자의 의도를 찾을 수는 없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문장을 맨 앞에 둔 것은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사후 특정 시점에 『논어』를 편집한 사람이다. 『논어』는 편집서이며,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논어』 말고도 다양한 편집본이 존재했다. 『논어』 텍스트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 왔고, 그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를테면 마이클 헌터(Michael Hunter)는 근년에 발간한 『Confucius Beyond the Analects(Leiden: Brill), 2017』라는 책을 통해서 한무제(漢武帝, 156 BC-87 BC) 시기 이전에는 “『논어』와 같은 공자 관련 문헌이 특별한 신뢰나 권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2

이와 같은 논쟁의 결론이 무엇이든 ‘학’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논어』의 서두에 온 것은 공자의 의도가 아니라 『논어』 편집자의 의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이 곧 편집자 마음대로 『논어』의 순서를 정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와 같은 편집은 공자 사상의 핵심을 학(學)으로 파악하려는 일련의 흐름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공자보다 후대의 사상가인 순자(荀子)의 텍스트 역시 勸學(권학)이라는 장으로 시작하는데, 그 또한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애초에 공자가 ‘학’에 대해 적지 않은 언술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입체적인 개념으로서의 ‘학(學)’
공자가 ‘학’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학’이라는 단어가 『논어』 전체에 걸쳐 65번이나 사용된다는 사실로부터도 확인된다. 그런데 ‘학’의 의미심장함은 단지 양적인 차원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학’이 질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단어라는 것은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찌 꼭 책을 읽은 뒤에야 배움이라고 하겠습니까?”(何必讀書, 然後爲學)(『논어』, 先進, 25) 이 언명은 ‘학’이라는 것이 대체로 책을 읽는 일이기는 하지만 꼭 그에 한정되지 않는 입체적인 개념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학’이란 단순한 지식 습득 활동에 그치지 않고 어떤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내는 규범적인(normative) 차원을 가진 개념임을 보여준다. 즉, 배운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바람직한 상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실제로 책을 읽었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배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학’의 이러한 규범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논어』에 자주 나오는 ‘호학(好學, 배우기를 좋아하다)’이라는 단어다. ‘호학’은 단순히 누군가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현상을 서술하는 데 그치는 말이 아니다. 『논어』에서 거듭 나오는 ‘弟子孰爲好學(제자 중에서 누가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누가 ‘호학’이라는 범주에 해당하느냐(爲)는 물음이다. 즉, ‘孰好學(숙호학)’이 누가 배움을 좋아하느냐는 단순히 현상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면, ‘孰爲好學(숙위호학)’은 누가 호학이라는 범주에 속하느냐는 질문이다. 화자가 일부러 ‘爲(위)’자를 추가해 ‘孰爲好學’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논어』 텍스트 내에서 ‘호학’이 하나의 범주로 작동하고 성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이 그러하듯이 ‘호학’ 역시 단순히 지식 습득 활동을 좋아하는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바람직한 상태를 나타내는 규범적인 차원을 가진다. 따라서 “제자 중에서 누가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어떤 현상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제자들 중에 누가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공자는 스스로를 평가해 “나만큼 배움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不如丘之好學也. 『논어』, 公冶長, 28)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단한 자기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학’이 어떤 바람직한 활동을 나타낸다고 해서 ‘학’이 모든 경우에서 다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배움이란 각기 다른 조건에서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논어』에서 ‘학’이라는 글자가 종종 ‘학이(學而)’라는 표현 속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學而不思則罔’(배우되 사변을 행하지 않으면 맹하다. 『논어』, 爲政, 15), ‘學而不厭’(배우되 염증내지 않고. 『논어』, 述而, 2), ‘學而優則仕’(배우고 여력이 있으면, 『논어』, 子張, 13)와 같은 구절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문장들에서 ‘학’을 뒤따르는 글자인 ‘이’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을 순접이나 역접, 혹은 가정문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뒤에는 배우는 일에 대한 상황을 제한하는 말이 따른다. 이런 식으로 『논어』는 배운다는 일이 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 걸쳐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學)’은 명사인가, 동사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학’이라는 단어는 윤리학, 물리학, 화학과 같은 학문 명칭의 끝에 붙는 글자로 익숙하다. 그렇다면 학은 ‘배우다’라는 의미의 동사인가, 아니면 ‘학문’과 같은 명사인가? 『논어』의 주석사에서 이 사안은 종종 논쟁이 됐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와 같은 학자는 그 유명한 『논어집주』에서 ‘학’이 ‘배우다’라는 의미의 동사임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주희보다 후대학자인 청나라의 모기령은 『사서개착』이라는 저서에서 ‘學者, 道術之總名(학이란 도술을 총괄하는 이름이다)’라고 주장해 주희의 견해에 반대했다. 모기령의 뒤를 이은 정수덕은 『논어집석』에서 모기령에 찬동한 바 있으며(“‘學’字系名辭, 『集注』解作動辭, 毛氏譏之是也”), 현대 학자인 양차오밍 역시 정수덕의 견해에 동의했다. 3 그 결과, 양차오밍은 ‘學而時習之’를 ‘배우고 익히면’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만일 나의 학설을 시대 혹은 사회에 받아들인다면’ 4 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현행 『논어』 텍스트에서 ‘학’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학술’의 의미로 사용한 적은 없다. 공자 이후에 제자백가가 난립하면서 제자백가의 입장들을 ‘학’이라는 명사로 개념화하는 현상이 늘어났을 뿐이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편에 나오는 ‘百家之學(백가지학)’이라는 표현이 좋은 예다. 그러한 현상은 후대로 갈수록 가속화됐기에 후대의 주석가들이 ‘학’을 학설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논어』의 첫 구절에서 나오는 ‘학’은 문맥상 동사로 쓰였다고 봐야 한다.


‘학(學)’의 목적어는 무엇인가?
‘학’이 (타)동사라면 배움의 대상을 목적어로 요청한다. 그러나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본 상당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번역하거나 해설할 때 ‘학’의 목적어를 재구성하지 않고 있다. 목적어를 삽입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류종목 번역본이나(무언가를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느냐?) 5 이나 홍승직 번역본처럼(뭔가를 배우고 시간 날 때마다 복습하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6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표현을 삽입하곤 한다. 그러나 도둑질을 배우는 일마저 공자가 배움으로 간주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학’의 목적어로 명시되는 대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주역을 배우다’(學易. 『논어』, 述而, 17)나 ‘시를 배웠는가’(學詩乎. 『논어』, 季氏, 13)와 같은 표현은, ‘학’의 목적어가 텍스트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배운다는 것은 대체로 책을 읽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꼭 독서를 한 연후에야(혹은 서경을 읽은 연후에야) 배움이라고 하겠습니까?’ (何必讀書, 然後爲學. 『논어』, 先進, 25)라고 한 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자로의 물음에는 책을 읽는 것이 대개 배움으로 간주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책을 읽는 것만이 배움은 아니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독서가 유일한 배움의 길이 아니라면 그 밖의 배움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논어』에 나오는 ‘예를 배웠는가’(學禮乎. 『논어』, 季氏, 13)와 같은 문장은 예(禮) 역시 배움의 목적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절에 근거해서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와 같은 학자들은 ‘학’의 생략된 목적어가 ‘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공자나 그의 추종자들이 예를 배움의 대상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논어』 외부에도 많다. 이를테면 묵자(墨子) 텍스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학’의 목적어가 ‘예’임을 시사한다. ‘군자는 제사와 예는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君子必學祭祀. 『墨子』, 券12, 公孟)

『논어』에서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례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군자는 먹는 일에 있어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에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일 처리에는 기민하되 말하는 데는 신중히 하고,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옳고 그름을 바르게 가린다. 그러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논어』, 學而, 14)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공자가 일상의 처신과 같은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예 역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각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텍스트와 예 이외에도 여러 경험적인 대상이 ‘학’의 목적어가 될 수 있다.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했다.’(樊遲請學稼.) (『논어』, 子路, 4)라는 표현은 농사일 역시 배움의 목적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밖에 ‘군사에 대한 일이라면 배우지 못했습니다’(軍旅之事, 未之學也. 『논어』, 衛靈公, 1)와 같은 문장은 군사상의 일 역시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농사나 군사상의 일들은 다만 공자가 관심을 둔 배움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논어』 첫 구절을 ‘삶에 필요한 기예를 배우고 익혀라’라고 번역한 신창호 번역본 7 은 무리가 있다. ‘삶에 필요한 기예’라는 표현은 공자가 배움의 대상으로 강조하고 싶지 않았던 농사일 같은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인 대상도 ‘학’의 목적어가 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도(道)’와 같이 신비한 형이상학적 실체도 배움의 목적어가 될 수 있을까? 다음 구절은 ‘도’ 역시 배움의 목적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유가 대답해서 말하기를, 옛날에 제가 선생님께서 ‘군자는 도를 배우면 남을 아끼고, 소인은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논어』, 陽貨, 4) 비슷한 취지에서 다산 정약용도 『논어고금주』라는 저서에서 ‘도’가 ‘학’의 목적어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어떤 이가 이르기를 ‘학(學)이란 도(道)를 학습하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다. 賈誼의 『新書』에서는 『逸禮』를 인용하여 ‘小學에서는 小道를 학습하고, 大學에서는 大道를 학습한다’고 하였다.” 8 현대 『논어』 한국어 번역자 중에서는 장기근이 『논어』 첫 구절을 번역하면서 ‘學(학): 도(道)를 배워 깨닫고 행한다’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9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오늘날에는 ‘도’라는 단어가 형이상학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논어』 텍스트 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논어』 학이편에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의 뜻을 살펴보아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의 행동을 살펴보아라. 3년 동안 아버지의 道를 바꾸지 않으면, 孝라고 할 만하다.’(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라는 문장이 나온다.(『논어』, 學而, 11) 여기서 아버지의 도란 아버지의 생전 행동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은 모두 『논어』 텍스트에 나오는 ‘학’의 목적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의 목적어는 바뀌게 된다. 그리고 목적어가 바뀌면서 ‘학’의 의미마저도 재정의된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일. 일단 여기서는 『논어』 텍스트 내에서 ‘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學)과 사(思)
어떤 것의 의미는 무엇과 대조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인간이 짐승과 대조될 때 갖게 되는 의미와 로봇과 대조될 때 갖는 의미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논어』에서 ‘학’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려면 ‘학’이 무엇과 대조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논어』에서 ‘학’은 ‘사’(思)라는 말과 거듭 대조를 이룬다.

‘배우되 사변을 행하지 않으면 망하고, 사변에 종사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논어』, 爲政, 15)와 같은 문장이 좋은 예이다. 이 문장은 學(배움)과 思(사변)의 상호보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의 상호보완을 논하기 위해서는 일단 양자가 구분돼야 한다. 이처럼 『논어』 텍스트 내에서 ‘학’의 의미는 외부 세계와의 새로운 경험 없이 성립하는 ‘사변’(思)과의 구분 속에서 성립한다. 다른 예로는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사변에 몰두해본 적이 있는데 무익하였다. 배움만 못하다(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 『논어』, 衛靈公, 31)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 이 문장에서 ‘학’은 사변과는 달리 외부 세계와 접촉해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 둘 중에서는 ‘학’이 갖는 우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려면 일단 양자가 구별돼야 한다. 이처럼 『논어』 텍스트 내에서 ‘학’의 의미는 ‘사’와의 구분 속에서 성립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배움’이라는 말은 종종 사변의 차원을 포함한다. 따라서 『논어』에서 말하는 ‘학’이 우리가 사용하는 ‘배움’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에 와서 배움이라는 말에 ‘사변’의 차원을 갑작스럽게 집어넣은 것은 아니다.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편찬된 『논어집주대전』 안의 세주(細註)는 『중용』에서 나오는 표현을 활용해 ‘박학, 심문, 근사, 명변, 독행이 모두 학의 일이다(博學審問謹思明辨篤行皆學之事)’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일정 시기에 이르면 『논어』의 주석에서마저 ‘사’가 ‘학’의 일부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배움에 사변을 포함하는 일은 전통 시대로까지 소급해갈 수 있다. 경험적 배움과 사변을 대조시키는 것은 『논어』 텍스트의 특징이다.

‘학’의 기쁨
『논어』 첫 구절의 궁극적인 신비는 배운다는 일의 호소력을 다름 아닌 그것이 유발하는 기쁨에서 찾았다는 데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돈이 되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존경받지 않는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미남미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대신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움이 가져다주는 효용 때문에 지겨운 공부를 참아가며 해온 많은 이에게 이 언명은 놀랍게 들릴 것이다.

배움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쾌락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과도 다르다. 『논어』의 첫 구절은 배움의 과정에서 기쁨이 유발된다는 진술일 뿐 쾌락을 목적으로 간주하고 공부를 수단으로 간주하라는 조언이 아니다. 『논어』의 첫 구절은 차라리 인간의 행동을 특정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정의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에 대한 정면 반박에 가깝다. 공부가 외적인 성취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 공부에 기쁨은 없다. 실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어떤 외부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기 어렵다.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은 다 하기 싫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하고 싶다, 일 빼고. 즉 수단화되지 않은 활동에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경제적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소위 ‘순수’ 학문에 매진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대개 수단화된 공부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다. 그들 상당수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하려고 한달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공부하고자 한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왜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이러한 대답은 공부하는 순간이 주는 기쁨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논어』의 첫 구절을 닮았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도 있다. “공부 말고 다른 데는 정붙일 데가 없어서요.” 이러한 대답은 세상의 다른 일에 대해 충분히 환멸을 느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공부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공부에는 다른 일에는 없는 특유의 매혹이 있음을 시사한다.

첫 번째 대답과 두 번째 대답이 공유하는 것은 두 대답 모두 공부가 가진 무목적성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어떤 외부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은 공부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 때맞추어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첫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취지에서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은밀한 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 즉, 문이 없던 곳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고, 문 자체와 함께 육체가 열린다.”

그렇다면 배움의 쾌락이 사라진 세계는 어떠한가? 배움의 쾌락이 사라진 그 사막 같은 세계를, 프랑스 작가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은 『미미한 천사들』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터였다. 공부가 점점 싫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분야를 익히는 게 잘되지 않았고 애초 갖고 있던 지식이 개선되지도 않았다. 이런 식이다. 갑자기 학습 욕구가 사라지고, 호기심이 무뎌지며, 노쇠가 시작되지만 그게 슬프지도 않은 것이다. 시금치 한 다발 앞에 앉아 파슬리를 지켜보고 그걸로 만족한다.” 10

‘학’의 정치성
배움으로부터 쾌락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배움이 갖는 특유의 정치성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를 기대하기에 배운다. 배움을 통해 보다 나은 상태로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없다면 배움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보다 나은 상태’라는 말은 인간의 상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각 상태 간에 위계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즉, 배움의 정도에 따라 어떤 이는 질적으로 보다 나은 상태에 있고, 다른 이는 보다 못한 상태에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보다 나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만약 위계가 존재하되 변화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의 경쟁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위계가 바뀔 가능성이 없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분투를 그만둘 것이다. 그런데 위계의 관념이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결합할 때, 흥미로운 정치 동학이 발생한다. 이제 인간은 너도나도 배움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보다 나은 상태’에 위치시키려고 분투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상태’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사회 속에서 보다 나은 지위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러한 이들, 즉 엘리트는 자신이 누리는 상위의 지위로 인해 보다 많은 자원을 향유한다. 엘리트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 엘리트의 상태는 부럽다. 자신도 그러한 상태와 지위를 거머쥐고 싶다. 자신도 배움을 통해 변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들도 이제 경쟁에 뛰어든다. 이 모든 에너지는 배움을 통한 변화 가능성과 위계의 관념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일생의 에너지를 바친 그 경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배움을 매개로 한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배움의 내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마치 대학입시의 과목이 크게 바뀌면 그에 따라서 합격자가 크게 바뀌는 것처럼. 이리하여 배워서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만큼이나 배움의 내용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일 역시 정치 투쟁의 일부가 된다. 사람들은 필수과목을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유리한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고 분투한다. 필수과목이 무엇이냐에 따라 합격자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배움의 내용을 정하는 문제는 곧 그 사회의 엘리트가 누구냐를 정하는 일과 직결된다.

『논어』가 겪은 가장 극적인 운명은 과거시험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텍스트가 후대에 이르러 사회의 엘리트를 뽑는 시험 과목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다. 즉, 『논어』가 과거시험 과목의 일부가 되면서 배움의 정치적 동학에 적극적으로 휘말리게 된 것이다. 세속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배움의 기쁨을 설파하던 텍스트가 세속적 성공의 필수과목이 됐다는 것은 동아시아 문화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다음의 일화는 『논어』의 첫 구절이 겪게 된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송나라 이후에는 출판업에서는 건안(建安) 여(余) 씨가 유명했다. 하도 유명한 나머지 중국 책 문화에 대한 명저인 섭덕휘의 『서림청화』에서 별도의 항목을 마련해 그 가문이 출판한 서적을 설명할 정도다. 건안 여 씨 후손 중에 특히 명나라 시기 서적상으로 유명했던 여응규(余應虯)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험서가 수익성이 높았기에 여응규가 거업서라고 불리는 수험서 혹은 과거시험 모범 답안지를 간행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의 서지학자 이노우에 스스무(井上進)에 따르면, 그가 편찬한 수험서 『新擬科場急出題旨原脈(신의과장급출제지원맥)』은 일본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소장돼 있다. 호사문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아홉 번째 아들인 요시나오를 오와리 번(尾張藩, 오늘날의 나고야)의 번주로 임명하면서 하사한 책들이 뿌리가 된 유명한 문고다. 그 책의 서두는 『논어』의 첫 구절이 겪어야 했던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 준다. “『논어』 첫 구절에 대한 시험문제는 학과 습 두 글자가 중요하다. … 시험 치는 사람이 이 뜻을 잘 체득해서 부연하면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다.(此題只重學習二者. … 作者體此意敷衍, 便是元魁局面).”

이리하여 한때 배움의 기쁨을 안내하던 『논어』의 첫 구절은 과거시험 합격을 위해 외워야 하는 대상이 됐으며 모범답안과 함께 돌아다니는 신세가 됐고, 결국에 가서 배움의 희열을 잃는 과정에 일조했다. 이러한 『논어』 첫 구절의 운명은 오늘날 고전 읽기가 겪고 있는 비극적 운명과 닮았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69호 Gen Z 2019년 3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