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앞에서 종교 논쟁만...

34호 (2009년 6월 Issue 1)

달량성의 참변
명종 10년(1555년) 5월 11일, 전남 영암 달량에 왜선 11척이 나타났다. 왜구의 배는 큰 배와 작은 배가 섞여 있었는데, 평균치를 내면 대략 1척당 병력이 30∼40명 정도였다. 300∼400명 정도의 병력이 바로 해안에 상륙해 마을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시작했다. 달량에 성이 있었지만 상주 병력은 20명에 불과했다. 인근에 있던 가리포 첨사 이세린은 즉각 전남 지역 군사령관 원적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다. 조선시대에는 군 기지나 군현에 상주하는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의 규모를 파악한 후 지역 사령관이 주변 군현의 병력을 동원해 대응했다. 보고를 받은 원적은 각 고을에 동원령을 내리고, 급한 대로 자신의 호위무사 20여 명과 병영의 병력 및 인근 장흥과 영암의 병력을 데리고 달량으로 출동했다.
 
먼저 달량성으로 들어가 농성하면서 왜구를 묶어놓고, 주변 고을의 증원 부대가 차례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원적의 작전이었다. 그런데 원적의 구원병이 달량성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60척의 왜선이 더 나타나더니 거꾸로 달량성을 포위해버렸다. 처음의 11척은 미끼였다. 조선의 군사 시스템을 잘 알고 있던 왜구가 일부러 소수의 병력을 먼저 보내 구원 부대를 유인했던 셈이다. 왜구가 60척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었음을 미리 알았다면, 원적은 더 많은 군현의 병력을 모아 신중하게 대응했을 수 있다.
 
적의 병력이 우세한 데다 오랫동안의 평화로 군비를 소홀히 한 탓에 달량성에서는 이틀 만에 식량이 떨어져버렸다. 원적은 전투를 금지하고 협상을 제의했다. 조선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간파한 왜구는 바로 성을 넘어 들어와 병사들을 학살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 부사 한온은 피살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항복해 포로가 됐다. 병마절도사가 왜구에게 살해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없었던 치욕이었다.
 
패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암 주변에 주둔하던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 김빈과 진도 군수 최린도 부랴부랴 달량으로 출동했지만, 역시 이를 예측한 왜구가 길목에 매복해 있었다. 김빈은 목숨을 건졌지만 패하고 깃발까지 빼앗겼다. 해남 현감 변협도 군사 300명을 인솔하고 달량으로 가다가 도중에 격파됐다.
 
이 전투로 한순간에 전라도의 수비대가 무너져버린다. 기세가 오른 왜구는 진도로 들어가 진도 해안가에 세운 수군 기지 남도와 금갑항을 함락하고 주변을 유린했다. 5월 21일에는 원적의 패배로 텅 비어버린 전라도 병영과 장흥부에 침입해 병영에 비축해둔 병기와 군량까지 모조리 털어갔고, 26일에는 강진까지 함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태종∼세종 때 왜구를 퇴치한 이래로 자질구레한 해적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런 대규모 침공은 근 150년 이래 처음 일어났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있었지만, 그 사건은 삼포에 살던 왜인들이 조선 관리와 다툼을 벌여 발생한 소요 사태였다.
 
놀란 조정에서는 문관이었지만 지휘 능력이 있던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김경석과 남치근 등의 무장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훈련과 무기가 부족해 왜구를 쉽게 토벌하지 못했다. 도저히 정면 대결을 할 수 없어 왜구가 상륙한 주변에 주둔해 왜구의 진로를 막고, 왜구가 후퇴하면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등 토벌한다기보다는 몰아내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왜구가 실수를 한다. 급하게 여러 도시들을 한꺼번에 약탈하려다 보니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강진을 공격한 부대는 성공했지만, 영암으로 간 부대는 저항에 부딪혔다. 급히 영암으로 들어온 이준경은 민심을 수습하고 군민을 단결시켜 강력히 싸웠다. 왜구도 제대로 된 정규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군이 용사들을 출동시켜 공격하자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 영암에서 거둔 왜구의 시체만 100여 구였다. 타격을 받은 왜구는 철수하게 되는데,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여러 곳을 습격했다.
 
산으로 가는 논쟁
그런데 달량성이 함락되고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5월 22일, 조정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이 나온다. ‘급히 화포를 만들어야 하니 남대문과 동대문에 걸어둔 동종을 녹여 총통을 주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종은 원래 정릉 원각사에 있었는데, 매일 시간을 알리기 위해 타종하는 종각의 종소리가 성문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걸어뒀다.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도성의 성문에 사찰의 동종이 턱 하니 걸려 있으니 영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을묘왜변을 구실로 이 보기 싫은 종을 없애버릴 생각을 하게 됐다.

종을 성문으로 옮겼던 사람이 중종 때의 악명 높은 간신으로, 끝내는 역모 죄로 처형된 김안로였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설명이 복잡하지만 김안로가 종을 성으로 옮긴 이유가 조선왕조의 성은 이(李)씨라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하고 자신의 성은 김(金)인데, 쇠로 만든 종을 성문에 걸어 쇠(金)에 해당하는 자신의 기를 강화하고 목을 억눌러 왕이 되려는 속셈이었다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좀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간에서 쇠를 거두면 민폐를 끼친다. 총통을 만들려면 재료가 좋아야 하는데, 불가에서 만든 동종은 이미 최고의 정품 재료로 만든 종이라 시장에서 사들이는 동보다 품질이 월등히 좋다는 등의 이유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당장 게릴라 투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국가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데 이런 비상 요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명종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오늘날로 치면 종이 오래된 문화재라는 이유를 대기도 하고, 왕의 사유재산인 내수사에 보관한 동철을 내놓겠다는 제안도 했다.
 
그런데 이 제안이 역효과를 일으켰다. 종을 보호하기 위해 사재까지 기부하겠다는 국왕의 태도는 관료들의 눈에 영락없이 불교에 대한 배려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명종 때에 전통적인 억불 정책을 완화하고 불교를 크게 지원했던 게 사실이라 관료들은 흥분했다. 그들도 반격해 그 종이 어렵다면 전국에 있는 사찰의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자는 수정안을 냈다. 국왕과 신하들 간에 벌어진 이 논쟁은 왜구가 물러난 뒤에도 몇 달간 계속되면서 마침내는 왜변보다도 종을 녹이는 일이 더 심각한 문제가 돼버렸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을묘왜변은 반성할 것이 참 많은 사건이었다. 조선의 군비와 전쟁 대처 능력도 그렇고, 왜군이 조선의 전술과 전투 방식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심각한 문제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조선에는 다행일 수도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의 국방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점검을 할 계기를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에 걸린 종은 사태를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왜구가 물러가자마자 이런 초미의 사태가 일어난 이유가 왕실의 불교 우대 정책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마침내 어느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는 관료)은 이렇게 말한다. “왜구의 변은 작은 피해에 불과하나, 부처를 받드는 것은 앞으로 커다란 불행이 되어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 사관의 예측은 정확하게 반대가 됐다. 40년도 지나지 않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을 멸망 직전의 위기까지 몰아갔기 때문이다.
 
소탐대실
을묘왜변의 교훈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은 관료들이 눈앞에 벌어진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논리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들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수준을 넘어 사태 판단 자체의 본말을 전도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믿을 수 없는 일 같지만, 이런 현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대중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비단 대중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 앞에 놓여 있는 올무다. 사람들이 이 올무에 걸려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개인의 욕심과 탐욕, 이기심이나 열등감 같은 속성, 특정 가치와 목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21세기라는 오늘날의 현실과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외부 세계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의 가치와 관념에 매몰돼 자기계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동아비즈니스리뷰 285호 AI on the Rise 2019년 1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