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제갈공명’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지도자는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사람

34호 (2009년 6월 Issue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운동 선수에게 나이는 넘기 힘든 벽이다. 골프 등 일부 종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종목에서는 ‘서른 넘은 선수는 환갑을 지난 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배구 선수들의 생명은 유난히 짧다. 배구는 공중에서 움직이는 볼을 도구가 아닌 인체로 타격하는 스포츠다. 신체에 큰 부담을 주는 수직 상승 동작, 움직이는 볼을 때리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힘을 주는 몸동작, 관절에 무리가 가는 점프 후 착지 동작이 필수적이다 보니 다른 종목보다 신체에 미치는 부담이 크다. 배구계에서 노장 선수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평균 연령이 만 32세인 선수들을 이끌고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에서 세 차례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삼성화재 블루팡스 신치용 감독(54)이다. 삼성화재는 장병철(33), 석진욱(33), 손재홍(33), 최태웅(32), 신선호(31), 여오현(31) 등 핵심 선수들이 모두 서른을 훌쩍 넘겼다. “환갑이 넘은 어르신이 많아 내가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야 할 정도”라는 신 감독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신 감독은 ‘코트의 제갈공명’으로 불려왔다. 슈퍼리그 8연패를 포함해 무려 11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명장이다. 하지만 20082009 시즌이 개막할 무렵,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승은커녕 챔피언 결정전에도 오르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주전 선수들의 나이가 많은 데다 대부분 키도 작기 때문이다.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 한때 남자 배구 무적 시대를 이끌던 주역은 은퇴한 지 오래고, 젊은 피의 보강도 없었다. 키가 크고 싱싱한 선수들이 넘쳐나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대한항공 점보스,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등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삼성화재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2년 연속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신 감독은 “남들이 나이와 체력 문제를 거론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말하면 변명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선수들끼리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든 게 우승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훌륭한 전략과 뛰어난 기술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건강하지 않으면 결코 달성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시즌 초만 해도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1라운드에서는 최약체 KEPCO34와 상무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 팀에게 연패를 당했고요
솔직히 저도 올해 우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에만 진출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1라운드 때의 성적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팀은 아닌데 말이죠.
 
2라운드를 앞두고 선수단과 함께 계룡산에 올랐습니다. 선수들에게 말했죠. “우리 서로 마음을 열고 새롭게 시작하자. 너희가 나이가 많은 건 나도 알고, 너희도 알고, 세상이 다 안다. 지금 와서 너희들의 힘이나 실력이 더 늘지도 않을 거고, 선수를 새로 영입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끼리 팀워크를 발휘하는 길뿐이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노력도 해보기 전에 나이 많고 키 작다고 우리끼리 변명하지는 말자. 배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우리끼리 합심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1라운드 때만 해도 선수단 내부에 알게 모르게 ‘이 전력으로 우리가 어떻게 또 우승을…’이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어요. 세상에 변명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좋은 환경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는 일은 누구든 할 수 있잖아요. 어려울 때 잘하는 사람이 진짜 강자이고, 삼성화재는 안 좋은 여건에서도 우승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팀이라는 자부심을 갖자고 독려하니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회 전체가 젊은 사람들만 원하고 있습니다. 성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감독으로서 노장 선수들을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배구는 신체 조건이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에 젊고 키가 큰 선수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하지만 애정과 열정이 있다면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연륜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노장 선수들은 젊은 선수들보다 책임감도 훨씬 뛰어납니다.
 
지도자는 선수들의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다는 뜻이고, 키가 작으면 순발력이 좋아 서브와 리시브에서 강점을 지닐 수 있으니까요.

 

동등한 실력인데도 젊은 선수를 기용하면 고참들이 동요합니다. ‘나보고 그만두라는 뜻인가’라는 마음에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요. 결국 팀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치죠. 실력이 비슷하면 고참들을 더 많이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석진욱 선수는 2006년 무릎 십자인대, 바늘판인대, 내측인대가 모조리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습니다만 부활에 성공했죠. 그래도 본인으로선 힘들었던 모양인지 시즌 전에 조심스레 제 의견을 구하는 눈치였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안 될 거라고 네 스스로 생각하는 거지, 아직 진짜로 안 된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너한테 펄펄 날기를 기대하는 게 아냐. 나도 안 되는 줄 아는데 그래도 한번 해봐. 진짜로 안 되면 그때 생각해보자.” 결국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까.
 
우리 팀 선수들은 굳이 제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코트에서나 코트 밖에서나 모범을 보입니다. 선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젊은 선수들의 태도도 달라져요. ‘나도 열심히 운동만 하면 되겠구나. 나이가 많다고 함부로 내쳐지는 신세가 되지는 않겠구나. 나이 많은 선배들도 저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 젊은 내가 힘든 티를 내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죠. 다른 팀에 가면 코치를 하고도 남을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니까 후배들은 다른 팀보다 2배 많은 조언자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효과가 절로 생기죠.
 
반대로 젊은 선수들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배구는 6명이 하는 운동입니다. 주전으로 뛰는 6명은 사실 관리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79번째에 있는 선수들이죠. 상황에 따라 뛸 수도, 안 뛸 수도 있는 이 선수들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이 선수들의 말이 많아지고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 팀은 무너집니다. 그런 분란을 없애려면 주전 선수들이 ‘다년간의 경험이 모이면 패기를 능가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수긍을 하죠.
 
우리 선수들은 시합이나 연습 도중 지칠 대로 지쳐도 감독이나 코치들에게 휴식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감독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동료들의 눈치가 보여 쉴 수 없다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죠. 선수들은 ‘쉬고 싶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운동하는 동료도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먼저 쉬겠는가. 프로는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것이 선수단 전체로 퍼져 나가 단합을 이루고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처럼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겁니다. 전술 하나 잘 만들었다고 그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고, 경기 한 번 이겼다고 그 팀이 강한 팀은 아닙니다. 감독이나 선수가 누구냐에 따라 움직이는 팀이 아니라, 조직 문화에 의해 움직이는 팀이 가장 강한 팀입니다. 감독이 모든 선수들의 움직임과 상황을 일일이 체크할 수는 없어요. 선수들의 정신을 바꿔놓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들이 알아서 따라옵니다.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조직 문화의 중요성을 유달리 강조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임승차입니다. 사회 조직에서는 사실 그 직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동, 특히 팀 스포츠에서는 그 선수만이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이 분명 존재합니다. 주전과 비(非)주전의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죠.
 
하지만 모든 선수가 그 자리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비주전 선수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결국 이들에게도 고유의 역할과 임무를 부여해주고, 자긍심을 심어줘야 합니다.
 
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팀의 문화는 훈련 때 선수나 스태프 중 아무도 노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면 걸레라도 들고 서 있든지, 응원단장 노릇이라도 하라고 강조합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죠. “네가 지금 우리 팀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으면 당장 팀을 떠나라. 아니면 네 스스로 일을 찾든가. 운동을 하든, 청소를 하든, 운전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팀에 기여해라, 아니면 내가 먼저 너를 버릴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뽑은 올해 우승의 주역은 고희진 선수입니다. 비록 매 경기 뛰지는 못했지만, 가장 많은 파이팅을 외치고 제일 열심히 동료들을 격려해줬습니다. 자신을 희생한 거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조직은 발전합니다.
 
감독님의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TV 중계가 뜨면 마이크 앞에서는 속공을 지시하면서도 세터에게 귓속말로 후위 공격을 시키신 것은 유명한 일화죠
그 점을 안 좋게 평가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정당한 규칙을 지킨다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언제나 ‘내가 저 팀 감독이면, 내가 저 선수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연구합니다. 바둑을 둘 때 몇 수 앞을 예측하는 것처럼 저쪽에서 A를 선택하면 저는 B를 선택하고, 다시 C로 나오면 저는 D로 대응하는 식이죠. 따라다니지 말고 앞서가야 합니다. 남을 따라다니면 늘 2등밖에 못하니까요.

 

예측이 어렵지 않느냐고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정보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쉽습니까. 상대 팀이 경기 후 인터뷰하는 모습만 봐도 그 감독의 습관과 성향을 알 수 있습니다. 몇 수 앞이 아니라 백 수, 천 수 앞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어요. 전술 개발도 절로 되고요.
 
그런 식의 작전 지시가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표현 못합니다. 선수들이 감독을 바라보는 눈빛도 금방 달라져요. ‘저 감독은 내가 신뢰할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구나’라고요.
 
복기(復棋)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선수들과 함께 복기하는 일을 즐깁니다. 다만 이겼을 때만 해요. 지고 나면 수고했다는 말만 하고 선수들에게 쉬라고 합니다. 선수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자기들도 오늘 어떤 점을 잘못했는지, 그걸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다 알아요.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제가 복기하자고 하면 잔소리밖에 안 되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고요. 이겼을 때 복기해야 “오늘 참 좋았는데, 이 점만 추가하면 되겠다”고 선수들에게 자연스레 주문할 수 있죠.
 
팀을 운영하다 보면 선수들이 늘 말을 잘 듣는 건 아닐 텐데,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물론이죠. 훈련이 너무 혹독하다, 왜 나를 안 써주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등등 불평이 없을 수 없죠.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기고 싶냐? 그럼 져줄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네가 나를 이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너는 나쁜 놈이고, 나는 쪼다로 전락하는 거야.(웃음)”
 
선수들과 저는 이기고 지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저는 지도자가 반드시 심리학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요. 혹독한 훈련이나 사생활 문제로 팀을 이탈한 선수가 있다고 치죠. 전화해서 “너 어디냐? 당장 안 오면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소리치면 절대로 안 돌아옵니다. 3일만 내버려두면 선수가 먼저 전화해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그때 이렇게 말하죠. “너는 나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네가 말썽을 부리는 일을 감당하는 건 지도자로서 내 임무다. 회사 직원이 잘못했을 때 사장이 책임을 지듯, 네가 사고를 친 것은 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너는 동료에게, 우리 팀이라는 조직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네 행동으로 선수들 간의 반목이 일어난다면 너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삼성화재를 논할 때 용병 안젤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팀 전력의 절반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는데요. 용병을 대하는 노하우가 있으십니까
안젤코를 영입할 당시 스카우터가 크로아티아로 갔습니다. 그 선수 어떠냐고 물었더니 “별론데 힘은 좋아 보인다”고 하더군요. 당시 안젤코가 뛰던 구단 쪽에도 물어보니 별로라는 거예요. 스카우터에게 “성격을 유심히 봐라. 성격만 좋으면 기본 힘이 있으니 나머지는 내가 채우겠다”고 말했죠. 비디오 자료도 보지 않은 채 영입을 결정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실력이 말이 아니어서 다른 팀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삼성이 엉터리 용병을 데리고 왔다고요. 이번 해에 꼴찌를 해서 내년 드래프트 때 좋은 선수 확보하려는 술책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죠.
 
하지만 특유의 성실함을 높이 샀습니다. 석 달간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는데 군말 않고 따라오는 걸 보면서 감이 왔죠. 실력이 뛰어난 용병들은 경기 중 실수를 저지르면 동료를 탓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안젤코는 다 자기 실수라고 하더군요. 화합과 조직력을 중시하는 삼성화재의 조직 문화에 딱 맞는 선수 아닙니까. 그래서 좋은 성적도 낸 거고요.
 
안젤코를 좋아하지만 저는 지금도 안젤코가 우승한 게 아니라 우리 팀이 우승한 것이고, 어떤 용병이 와도 그만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안젤코가 없을 때의 상황도 미리 대비해둬야죠. 그게 감독의 할 일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우승을 11번이나 하셨는데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나요.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창단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1995년 삼성화재 창단 때부터 14년간 팀을 맡다 보니,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에 덧칠을 하는 게 아니라 백지에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남이 그린 그림을 넘겨받았다면 제가 원하는 조직 문화를 그리기가 어려웠을 테니까요. 지금은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 사장이신 김응룡 전 해태 감독께서 18년간 한 팀의 감독을 하셨습니다. 그 기록을 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웃음)
동아비즈니스리뷰 285호 AI on the Rise 2019년 11월 Issue 2 목차보기